
전문가가 본 한수정
전 세계 식물의 마지막 피난처,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
2026년 여름이 길어지고 있다. 기상청이 분석한 ‘2026년 7월 기후특성’에 따르면 지난 7월 전국 평균 폭염 일수는 8.9일을 기록했고 열대야 일수는 2024년(8.8일)을 넘어 역대 최다를 갱신했다. 이러한 기록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닌, 새로운 기후의 표준(new normal)이 되어가고 있다. 같은 시기 국제식물원보전연맹(BGCI)이 펴낸 「세계 수목 현황 보고서(State of the World’s Trees)」는 충격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전 세계 약 60,000여 종의 수목 가운데 30%인 약 17,500종이 멸종 위협에 직면해 있으며, 적어도 142종의 수목이 멸종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2022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채택된 ‘쿤밍-몬트리얼 글로벌 생물다양성 프레임워크(GBF)’는 이러한 현실을 정면으로 인정했다. 2030년까지 멸종위기 야생종자의 90% 이상을 보존하겠다는 대담한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지와 프레임워크도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보존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지 못하면 공허한 선언에 그친다. 바로 이 물음에 한국은 구체적인 답을 가지고 있다. 경상북도 봉화군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지하 약 60m 암반층, 온도 영하 20도·상대습도 40%가 유지되는 세계 유일의 야생식물 종자 영구저장시설,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Baekdudaegan Global Seed Vault, BGSV)가 그것이다.
필자는 지난 수년간 BGSV의 운영과 국제협력 확대 과정을 직접 관찰해왔다. 본 고에서는 단순한 시설 소개를 넘어, BGSV가 왜 ‘전 세계 식물의 마지막 피난처’로 불리는지 그 자연적·기술적·외교적 근거를 살펴보고, 대한민국이 생물다양성 보전 분야에서 어떤 과학 외교(science diplomacy)를 수행하고 있는지를 서술하고자 한다.
자연이 선별한 위치, 기술이 완성한 금고
시드볼트가 무엇보다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은 ‘왜 하필 이곳인가’다.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BGSV)가 봉화 깊은 산속에 자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백두대간은 한반도를 관통하는 주산맥으로, 동북아시아 생물다양성의 핵심 연결축이자 생태 통로이다. 한반도에 분포하는 4,000여 종의 자생식물 가운데 상당수가 이 산맥을 중심으로 진화적 분화를 겪었으며, 그 유전적 다양성은 동아시아 전체 생물지리학의 보고가 축적된 공간이다.
자연적 조건만으로는 부족하다. 시드볼트는 인위적 재난뿐 아니라 기술적 결함에도 견뎌야 한다. BGSV는 지하 암반층에 건설돼 지진, 산불, 극단 기온 등 외부 충격을 차단하는 물리적 안전성을 확보한다. 내부는 영하 20도(–20℃), 상대습도 40%로 상시 유지되는데, 이 조건은 노르웨이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볼트가 채택한 표준과 일치한다. 영하 20도라는 저온 환경은 씨앗의 대사를 사실상 정지 상태로 만들어,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까지 활력을 보존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과학적 조건이다. 저장 용량은 약 200만 점(Accession)으로, 향후 세계 야생식물 자원의 수요 증가를 감당할 여유를 두고 설계되었다.
그렇다면 스발바르와 같은 조건의 시설이 세계에 두 곳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명확하다. 스발바르 시드볼트는 농작물(오곡, 감자, 옥수수 등) 종자 보전에 집중한다. 이에 반해 BGSV는 세계 최초이자 유일의 야생식물(wild plant) 전용 영구저장시설이다. 이는 시설의 단순한 차별화가 아니라, 생물다양성 보전 전략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인간이 재배하지 않은 야생식물은 생태계 회복탄력성(ecological resilience)의 본질적 원천이며, 그 소실은 돌이킬 수 없는 생태계 붕괴의 전조를 뜻한다.
야생식물 종자의 보전은 단순히 생물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기후 위기 시대를 대비한 ‘생태적 자산(Ecological Capital)’을 비축하는 행위와 같다. 특히 급격한 기후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대형 산불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 복원력을 가진 야생식물 유전원은 훼손된 생태계를 되살릴 핵심 열쇠가 된다. 즉, 시드볼트는 미래의 기후 적응형 품종 개발과 생태계 복원을 위한 ‘생명의 보험’인 셈이다.

중복보전과 국제 협력
BGSV의 진정한 가치는 시설의 물리적 우수성에만 있지 않다. 운영의 철학이 더욱 핵심이다. 시드볼트가 채택한 원리는 ‘중복보전’이다. 각국·각기관의 종자은행이 보유한 야생식물 종자의 일부를 추가로 기탁받아 별도 저장함으로써, 원래 보유지에 재난이 발생하더라도 종자가 영원히 남도록 하는 위험분산 전략이다. 즉 BGSV는 ‘보존의 최종 백업(backup copy)’ 역할을 한다. 개소 이후 BGSV에 입고된 종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다시 반출하지 않으며, 실제로 한 번도 반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 그 엄격함을 방증한다.
이 원칙은 곧바로 데이터로 입증된다. 2026년 6월 기준 BGSV에는 전 세계 6,404종 290,895점의 야생식물 종자가 보관되어 있다. 이는 개소 직후 수천 점 규모였던 저장량을 약 8년 만에 약 60배 이상 확장한 결과다. 이 가운데 국내 종자 비중이 약 58.5%, 국외 종자가 약 60%로, 명실상부한 ‘글로벌’ 시설로 자리 잡았다. 종자 기탁기관은 국내·외 100여 개 기관에 이르며, 협력 반경은 아시아·태평양을 넘어 아프리카·중남미·유럽 대륙의 식물원·종자은행으로 확대되었다.
실제로 BGSV는 단순히 종자를 보관하는 저장고를 넘어 국제적 보전 플랫폼으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아시아·아프리카 등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면서도 기후 위기에 취약한 국가들의 멸종위기 식물 종자를 우선적으로 기탁받아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으며, 이는 각국이 자국 식물 주권을 지키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외교’의 성공적인 현장이 되고 있다.
참고로 오랜 비교 대상이었던 스발바르 시드볼트는 2026년 6월 둘째 정기 입고에서 11개 유전자원은행의 15,000여 종자 샘플을 추가하며 누적 보관량 140만 점을 돌파했다. 스발바르가 작물, BGSV가 야생식물이라는 역할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두 시설이 함께 글로벌 보전망의 양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2026년 현재 더욱 분명해졌다.
특히 2025년 출범한 ‘국제 식물 종자보전 사업(Global Seed Conser vation Grants Program)’은 BGSV가 단숨에 저장시설을 넘어 국제협력의 허브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활동은 생물다양성협약(CBD)과 나고야 의정서(Nagoya Protocol) 체제하에서 생물자원에 대한 국가 주권이 강화되는 시대, 야생식물 종자의 평화적·과학적 공유는 그 자체로 과학 외교의 한 형태다. 특히 이지스자산운용과의 ESG 협력을 통해 재원을 마련한 것은 글로벌 시드볼트가 공공-민간 파트너십의 지속가능한 모델을 구축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BGSV는 ‘자연이 선별한 위치, 기술이 완성한 금고’가 ‘외교가 운용하는 자산’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증언하고 있다.
‘시드볼트 5030’과 보전의 약속
시드볼트의 가치는 언제 종자를 ‘꺼내는가’가 아니라 언제까지 ‘들고 있는가’에서 결정된다. 이 시간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매년 5월 30일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의 날’이다.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은 목표 연도 2050년의 숫자 ‘5’와 보전 목표 비중 30%의 ‘30’을 결합해 ‘5030’이라는 슬로건을 도출했다. 이는 2050년까지 전 세계 야생식물 종의 약 30% 저장이라는 명확한 수량 목표와 시간표를 동시에 천명한 것이다.
이 ‘5030’은 국제사회가 합의한 목표와 정확히 호응한다. GBF는2030년까지 멸종위기 종자의 90% 보전을, 동시에 유전자원 접근· 공유 이익의 공정한 분배를 목표로 제시한다. BGSV의 5030 약속은 야생식물 영역에서 GBF의 의미를 구체화한 운영적 로드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보전이 필요한 종의 70% 이상이 서식지에 존재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BGSV의 역할은 자국 보전을 넘어 지역의 안전망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 약속은 시민과 함께할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 산림청과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은 ‘시드볼트 탐험대’와 같은 가족 캠프, 교육 전시, 시민과학 프로그램을 통해 BGSV를 단순한 연구시설이 아닌 국민의 자산으로 전환하고 있다. 2025년 기준 시드볼트의 날 행사에는 국내외 연구기관, 시민 단체, 학생 봉사단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했다. 이는 GBF가 강조하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참여(whole-of-society engagement)’ 원칙과 정확히 부합하며, 생태 감수성(ecological sensitivity)을 일상으로 끌어들이는 사회적 보전(social conservation) 패러다임의 실천이다.
문화적 차원에서도 의미는 작지 않다. 봉화 산속 깊은 곳에 ‘한국판 노아의 방주’를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생태문화의 새로운 서사를 형성하고 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의 ‘봉자페스티벌’과 연계한 교육·체험 프로그램은 BGSV의 추상적 개념을 경험의 언어로 번역하여, 지역사회에 ‘자신이 산 위의 금고를 지키고 있다는 자긍심’을 심는다. 이는 지역 정체성과 생물문화다양성(biocultural diversity)의 동시 보전이라는 한국형 보전 모델의 독창성을 보여준다.
과학 외교의 중심으로 서다
1958년 노르웨이 스발바르제도의 만년설 속에 첫 시드볼트 구상이 제기된 지 약 70년. 그사이 인류는 수많은 종을 잃었고, 지금도 빠르게 잃고 있다. 그 시간의 무게를 한국 봉화의 산속, 지하 암반이 받고 있다. BGSV는 단순한 저장시설이 아니라 기후위기 시대 대한민국이 세계에 건네는 약속이다.
결국 BGSV가 상징하는 가치는 ‘씨앗의 보전’을 넘어 ‘미래 세대의 선택권 보전’이다. 노르웨이나 영국 같은 선진국의 모델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생태지리학적 조건과 사회문화적 맥락에 맞는 독자적 보전 모델을 개발했다는 점. 그리고 그 모델이 ODA 당사국에서 보전 당사국으로 전환한 대한민국의 경험과 기술을 집약하고 있다는 점. 이 두 가지가 결합된 사례는 한국이 글로벌 생물다양성 거버넌스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국제적 모범이다.
자생식물 한 종, 종자 한 점은 윤리적으로 작아 보인다. 그러나 그 작은 점을 지키는 일은 한반도 생태계의 회복탄력성을 결정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생물다양성의 안전망을 완성한다. 백두대간의 깊은 산중에 심어진 이 생명의 금고가, 전 세계 식물의 마지막 피난처로서 인류의 약속을 영구히 품고 있기를 기대한다.










